- 용어가 바뀐다고 사회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문화’와 ‘상호문화’ 사이에서
- 2023.01.26 13:10
▲강희정 대표 (도스토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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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고향마을에는 미국인과 결혼한 자녀를 둔 분이 계셨다. 일정 기간이 되면 손자 손녀가 외가를 방문하였고 동네 사람들이 ‘미국인’이라 부르던(실제 국적이 미국이니 틀린 말이 아니다.) ‘미국에서 온 아이들’은 내가 만난 첫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었다. 당시에는 다문화 자녀를 혼혈아라고 부르던 기억이 난다. 어린이의 시각으로 우리는 그저 신기함에 ‘서울 아이’ 구경하듯 ‘미국 아이’를 구경했지만, 어른들의 시선은 달랐던 것 같다. 마을 어른들은 미국인과 결혼한 집안의 자녀를 자주 들먹였고, 그 부모조차 이야기하기를 꺼렸던 기억이 있다. 당시 단일민족의 자부심이 깊이 자리한 대한민국에서 국제결혼이란 수용하기 힘든 시기였고, ‘혼혈아’라는 용어가 가지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라는 경계를 짓는 언어였던 것은 분명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시점이 되자 국제결혼의 비율이 높아지고 혼혈이라는 단어도 점차 사라져갔다. 2000년대 초반, 다문화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결혼, 취업, 학업 등 여러 이유로 한국에 외국인의 비율이 늘고, 한국인의 외국으로의 이주가 늘면서 우리 사회는 여러 정책과 이슈 속에서 문화 다양성을 논하였고, 그 과정에서 다문화는 보편적 용어로 자리 잡게 된다.
다문화라는 용어가 자리 잡아가는 과정에 나 또한 다양한 다문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점점 익숙해져 갔다. 내가 만난 유학생, 결혼이주여성, 다문화 자녀, 중국동포…. 다양한 다문화 사람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융화되어 그들과 함께 할 때 다문화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우리 사회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다문화사회에 적응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2020년대 전후로 ‘상호문화(또는 상호문화주의)’라는 새로운 용어를 맞이하게 된다. 2020년 경기도 안산시는 국내 최초이자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유럽평의회가 주관하는 상호문화도시에 선정되었고, 상호문화도시 선정을 위해 준비 중인 지자체도 늘어가는 추세다. 이는 우리 사회가 기존 다문화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보완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 또한 ‘다문화를 넘어 상호문화’를 주창하며 다문화라는 울타리 안에서 새로운 구분을 짓기보다 관계를 중심으로 개인의 정체성 형성을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변화를 위해 용어를 변경하는 것은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문화, 다문화사회, 다문화주의, 상호문화, 상호문화주의, 그리고 이주민까지…. 용어가 바뀌는지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새로운 제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 주변에 이 단어들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또 용어가 바뀐다고 다문화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바뀔 수 있을까?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제도를 보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모델을 찾아 적용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용어의 변화가 반드시 인식의 변화를 이끌 수 있을까?’를 자문해 본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나은 방향으로의 제도 개선과 인식변화를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꼭 용어의 변화를 동반할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단일민족이라는 용어가 발생한 역사는 100년이 채 되지 않지만, 현재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단일민족의 자부심을 교육받으며 살아왔고, 현재는 다문화사회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단일민족에서 다문화사회로의 변화 과정에서 혼란은 있었으나 시간이 흘러 단일민족에 대한 인식은 흐려져 가는 추세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우리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고, 때로는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성장하며 변화하고 있다.
다문화사회로 접어든 이후에도 많은 혼란의 과정에서 제도의 개선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있지만, 여전히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다문화가 되었든 상호문화가 되었든, 일반인들이 느끼는 감정과 의식이 새로운 벽으로 인식되지 않기를 희망해 본다. 아울러 언젠가 ‘다문화’라는 용어 자체가 사라지는 날이 오길 바란다.
강희정 대표 (도스토리연구소) dotoriartn_info@naver.com